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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삼일절을 맞이하여 영화 <영웅>를 보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뮤지컬 영화로써, 이 영화의 등장인물, 줄거리, 역사적 사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영화 <영웅> 등장인물
안중근(정성화), 설희(김고은), 우덕순(조재윤), 조도선(배정남), 유동하(이현우), 마진주(박진주), 조마리아(안중근의 아내 나문희), 김아려(안중근의 처, 장영남) 등이 출연했다. 출연진을 살펴보면 이전에 뮤지컬을 경험한 배우들과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알려진 배우들이 함께 참여한 작품이었다. 여기서 가장 오랜 뮤지컬 경력을 가진 배우가 정성화였는데, 실제로 영화에서 안중근 역을 맡아 영화의 축을 잘 잡는 연기력과 표현력을 보여줬다. 사실 영화 <스플릿> 이후로 배우 정성화를 본 적은 없지만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 감정 표현과 호소력,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겠다는 각오부터 마지막 생과 사의 경계에서 고통받는 장면까지 정말 몰입도 높은 연기였다. 안중근 의사의 조력자 역할을 맡은 조재윤과 배정남이 감초 같은 역할을 맡았다. 지루할 수 있는 부분에 유머러스한 요소를 가미해 분위기를 자아내는 역할을 했다. 다만 안중근 의사의 대업을 돕는 조력자 조도선과 우덕순의 심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조력자들의 활동에 대해 유머를 줄이고 표현을 좀 더 많이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배우 김고은이 명성황후 암살 사건에서 궁녀와 스파이 역할을 맡은 가상의 인물인 설희를 연기했다. 방송을 통해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지만 뮤지컬 영화에서 다른 배우들의 표현력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중근 의사에 이어 거의 두 번째로 많은 분량이었는데,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실제 사람들의 삶과 활동에 더욱 초점을 맞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역은 배우 나문희가 맡았다.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가서 실제로 수의사에게 편지를 보냈다."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는 남겨진 유명한 말이다. 배우 나문희의 연기력이 정말 돋보였다. 그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걱정과 나라에 대한 마음 사이에서 자신의 걱정과 슬픔을 정말 잘 표현했다.
줄거리
회령전투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소식을 듣지 못하지만, 안중근 의사와 최재형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군 은신처인 독립군 만두가게에서 살아서 돌아온다. 그러나 안중근을 쫓는 와다 형사에게 만두 가게 주인과 안중의 친구가 살해당한다.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때 젊은 궁녀 설희가 살아남아 일본으로 가게 되고, 설희는 밀정이 된다. 그것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는 것을 돕는다. 설희는 일본에 가서 게이샤가 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눈길을 사로잡은 설희는 독립군 안중근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가려한다고 말한다. 결국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으로 떠난 이토 히로부미의 옆에 있던 비밀요원 설희는 이토 히로부미를 견제하기 위해 양복 안에 흰 손수건을 집어넣었고 설희는 잠결에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결심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명성황후 곁으로 돌아간다. 안중근과 동지들은 하얼빈역으로 오는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는 작전회의를 갖는다. 결국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도착해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권총을 쏴 죽이는 데 성공한다. 안중근이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처벌 이유를 밝힌다. 뮤지컬처럼 '누가 죄인인가'를 부른다. 한국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폭력으로 일왕을 폐위시키고, 1905 한일 조약과 한민족에게 조약을 강요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를 지은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은 '누가 죄인인가!!'라는 노래로 나열돼 있다 뮤지컬과 영화에서 최고의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안중근 의사는 감옥에 있는 동안 동양의 평화에 대해 쓴다. 현장에서 붙잡힌 안중근 의사에게 결국 사형이 선고된다. 1910년 3월 26일 아침, 영화 영웅인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 조마리아가 직접 만든 장막을 입고 사형수에 오르면서 막을 내린다.
역사적 실화
1909년 초 안중근 의사는 같은 의지를 가진 11명의 동지들과 동의단지를 결성하여 의병으로 부활시키려 하였고, 이때 왼손의 약손가락(네 번째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고 혈서로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은 이때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와서 블라디미르 코콜초프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난다는 소식을 듣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자청한다. 안중근 의사는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한다. 원래 계획은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동청철도의 기점인 장춘 남장춘과 인성자역, 차차지구의 종착지인 하얼빈이 있었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해 계획이 변경됐다. 이에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채가 지역의 계획은 이를 의심하는 러시아 경비대에 의해 실패하였다. 이어 26일 오전 8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해 블라디미르 코콜초프 러시아 재무장관과 열차 안에서 만나 오전 9시 30분경 러시아군의 검문을 받기 위해 하차한다. 안중근은 브라우닝 반자동 권총 M1900으로 열차로 돌아오는 길에 이토 히로부미를 쐈고, 나머지 4발 중 3발은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모리 타이지로, 가와카미 도시히코, 남만주철도 다나카 세이지로가 쏜 것이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가슴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에스페란토어로 파이팅을 세 번 외쳤다. 이 외침은 한국의 독립을 의미했다. 안 의사는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됐고, 1차 조사 끝에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를 일본이 아닌 러시아 황실에서 재판하도록 지시하고 자신의 변호사 미하일로프를 안 의사의 변호사로 준비했으나, 안중근 의사는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1910년 2월 14일 간토 지방의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같은 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현재까지 유해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함께 살던 우덕순은 징역 3년, 조경선과 유동우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는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체포되어 처형될 때까지 법정에서 어떠한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이유를 밝힌 안중근을 위해 범정부 성역 출신의 안병찬 변호사가 자유변론을 폈다.